비덕 & 덕만 팬픽 (下) 팬픽션

비담의 심리묘사가 불충분하다.
비담은 이러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팬픽이니까, 괜찮겠지.

(2009.10.) 



5.

 

덕만은 조용히 비담을 밀어냈다. 밀려난 비담은 다시 그녀의 품 속으로 파고들려 했지만,
덕만은 아예 몸을 돌려버렸다.


 
“……
아직도 아픈 거야?”


비담은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며 아이처럼 칭얼댔다.


 
난 정말 보고 싶었는데.”


덕만은 자신이 웃고 있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 놀랐다. 그 날 이후 비담에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안 되는 일이다. 비담에게 웃는 얼굴을 보이는 것은 유신랑을,
그리고 신라를 버리는 일이나 마찬가지라고 덕만은 생각했다.


 
“……
내일 국경으로 출발하는 거야?”


비담이 반색했다.


 
가지 말까?”


 
“…….”


 
아아~ 그럼 그렇지. 우리 공주님께서 나에게 가지 말라 하실 리가 없지.”


장난스레 말하는 비담의 눈은 덕만의 눈가와 뺨, 그리고 입가를 쉴 새 없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사실, 그는 늘 그러했다. 덕만은 너스레를 떨면서도 상대의 기색을 살피려는 비담 특유의 표정을 알고 있었다.
이 자는 오직 나와 스승에게만 그런 표정을 보이곤 했었지. 덕만은 잠시 문노를 떠올렸으나, 곧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지금은 망자(
亡者)를 떠올릴 때가 아니라 눈치 빠른 적을 상대할 때다.


나도 같이 가고 싶어.”


비담이 이상한 낌새를 채지 않도록, 덕만은 조심스레 말했다.


 
바깥 바람이 쐬고 싶어졌어.”


사람들은 비담이 자신의 스승을 죽였다 했다. 비담도 굳이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덕만은 자신이 비담의 열렬한 시선을 받는 살아있는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말을 맺었다.
이 배신, 비담이 눈치 챈다면 과연 뭐라고 할까?


하지만 그런 덕만을 바라보는 비담의 표정은 묘했다. 기뻐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표정하지도 않은 얼굴. 덕만은 비담의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마침내 비담의 표정이 바뀌었다.


비죽 웃는 얼굴.


 유신랑이 여기 왔었어?”

덕만은 침대에 웅크려 앉은 채 비담의 차가운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심장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덕만은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뭐라고 속삭였어?”


거친 비담의 숨소리는 사냥한 고기를 앞에 둔 맹수의 것처럼 사납고 비정했다.


 
유신랑……. 주군은 버려놓고 자기 목숨이나 건지고자 내뺐던 자야. 네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어?
곧 구하러 오겠다고? 아니면 왕이 이번에 국경으로 행차하는 틈을 노려 암살하겠다고? 그런데 말이야…….
그것 참 이상하지? 내가 내일 서라벌을 나서는 것은 극비 중의 극비인데, 한 줌도 안 되는 세력뿐인 유신이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완전히 부서지고 몰락한 그 자가 말이야…….”


특유의 고저를 가진 비담의 목소리는 섬뜩했다. 덕만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천운(
天運)은 아무래도 신라의 새 주인에게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 자를 죽일 수 있는 이도 현세엔 없겠다.
덕만은 상하고 피로해 보이기는 했지만 강한 의기(
義氣)만은 잃지 않고 있었던 유신을 떠올렸다. 그 강직하고 맑았던 눈,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겠구나.


비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비틀려 올라간 입 꼬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흰자위 위에는 실핏줄이 돋아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려는 무언가를 짓누르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덕만은 위험을 느끼고 자리에서
몇 걸음 물러섰지만 비담이 더 빨랐다. 그는 덕만의 손목을 낚아채 자신의 품 속으로 덕만을 끌어당겼다.
포옹이라기보다는 결박에 가까운 거친 태도였다.


 
이 침상이었어?”


비담의 메마른 입술이 덕만의 귀 끝을 스쳤다. 몸서리치는 덕만에게 비담이 다시 속삭였다.


 
이 침상 위에서 사랑을 확인했어? 거의 매일, 나에게 정복당했던 이 침상 말이야…….”


비담은 덕만을 찍어 누른 채 팔을 뒤로 꺾었다. 고통에 덕만이 비명을 질렀지만 비담은 요지부동이었다.
그의 검고 깊은 눈이 사냥감을 제압한 맹수처럼 번들거린다.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덕만은 얕은 숨을 뱉다가 겨우 대답했다.


 
유신랑과는 그런 사이 아냐.”


그것은 비담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비담은 덕만의 팔을 더욱 세게 눌렀다. 관절이 찢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에
덕만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강제로 몸을 탐했을 때조차 행여 그녀가 다칠까 전전긍긍했던 비담이다.
덕만은 그가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에 놀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는 말을 지어내어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어. 유신은, 유신은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냐!”


 
아니야. 공주님. 공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곤란해.”


비담이 부드럽게, 그리고 유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는 유신을 죽이고 싶었어. 처음 봤을 때부터 그 놈이 죽기를 간절히 열망했지. 돌처럼 강인한 의지에 맑은 심성…….
무겁고 정갈한 검. 그것들은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들이었어. 스승님께서 내게 원하셨던 것들이었다고.
그런데 엉뚱하게, 나에겐 없고 그 놈에겐 있는 거야? 이렇게 불공평한 게 어디 있어? 정말로 갈갈이 찢어서 죽일 일이지.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도 나는 그 놈을 살려 두었단 말이야……. 바로 당신. 덕만 공주님 때문에.”


덕만은 극심한 고통과 함께 팔이 마비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다.
그녀는 겨우 입을 열어 신음소리와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어째서? 어째서 나 때문이라는 거야?”


 
덕만 공주가, 그를 사랑하니까.”


비담은 스스로 입술을 깨물었다. 한 방울 핏빛이 입술 끝에 어렸다.


 
공주가 원하는 자가 바로 유신이니까.”


덕만은 가만히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아직까지 태동은 없었지만, 덕만은 이제 자신의 몸 속에 자리한
소중한 생명의 존재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비담. 아니라고 말해도 믿질 않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거짓말을 그만두면 되잖아! 제발…...”


덕만의 팔을 비틀던 비담의 강한 손은 어느 새 힘을 잃었다. 신음 소리를 뱉는 덕만에게 비담이 계속해서 말했다.


 
제발 부탁이야. 진실을 말해 줘. 사실을 인정해 줘. 네가 유신을 사랑한다고, 그를 믿고 사랑한다고…… 그래야, 그래야만.......”


널 포기할 수 있어! 비담은 절망에 사로잡혀 외쳤다. 하지만 비담의 마음 속에서 울린 그 피맺힌 외침은
덕만에겐 들리지 않았다. 사실 비담은 줄곧 아팠다. 군사를 일으켜 계림을 손에 넣었던 그 순간부터…….
왕으로 즉위하고 유신의 잔당들을 죽이고, 저항하는 공주를 범하던 그 모든 시간들이 비담에게는
바늘에 심장을 찔리는 듯한 날카로운 고통이었다. 다음 순간, 덕만은 마음을 정한 듯 고통에 떨고 있는
비담을 향해 고개를 바로 들었다. 


 
말 못하겠어. 왜냐면 그건 진실이 아니니까.”


 
그럼 진실을 말해!”


벼락 같은 비담의 고함소리.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혀 들었다. 검고 먹먹한 비담의 눈은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바닥으로 가라앉고 또 가라앉아, 마침내 심해의 바닥에 서서 해수면으로 떨어지는 엷은 햇살을 보는 듯 서늘한 눈이었다.
덕만은 그러한 비담의 눈에서 을 직감하였다. 그것은 또한 진실을 말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비록, 그가 그 모든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해빙기를 맞은 계곡처럼, 얇은 얼음조각들이 사방으로 깨져나간다.


안녕, 계림.


안녕, 유신랑.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여자인가 봐요.


 
사랑해.”


덕만의 목소리는 맑고 가늘었다.


 
사랑해, 비담.”

공주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연인(戀人)의 연녹색 소매 깃을 쓰다듬었다. 사락 하는 부드러운 소리에
비담은 퍼뜩 정신이 든 듯 했다. 이윽고 그의 검은 눈이 공주를 보았다. 하지만, 너무나도 슬프고 절박한 눈빛에 덕만은 당황했다.


 
비담?”


비담은 자신의 소매 위에 놓인 공주의 손을 뿌리쳤다. 거친 움직임에 몇 가닥의 머리칼이 비담의 반듯한
이마 위로 흩어진다. 덕만은 다시 비담의 소매깃을 잡으려 했으나 비담은 그런 덕만의 손길을 피해 몸을 움츠렸다.
겁먹은 아이 같은 동작이다. 심지어 비담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려 자신을 바라보는 덕만의 눈을 피하기까지 했다.
길고도 당혹스러운 침묵 뒤, 마침내 비담이 입을 열었다.


 
“……
이러지 마십시오.”


차갑고 메마른 목소리. 덕만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비담은, 이 외로운 남자는 사랑 고백을
받아들이는 방법조차 몰랐다. ‘사랑조차 자신이 원하는 그 무언가처럼 오직 쟁취하고 빼앗고,
또한 강요하는 것인 줄만 알았던 것일까? 아니면 설마…….자신의 고백을 마음의 없는 말을 억지로 한 것으로
여기는 것일지도……. 덕만은 서둘러 말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비담이 빨랐다.


 “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잖아요?”


고통을 참는 듯 묘하게 비틀린 표정으로, 비담이 웃었다. 덕만은 눈을 크게 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웃고 있는
비담이 이해되지 않았다. 차라리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면, 아니면 불같이 화를 냈더라면 덕만은 그를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담은 덕만의 당황한 표정이 자신의 추측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했는지 더욱 더 쓰게
웃을 뿐이었다.


 
베개 밑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비담의 하얀 손이 정확히 단검이 숨겨진 베개 위를 짚었다.


 “
왜 그걸 사용하지 않는지 항상 궁금했죠. 오늘일까, 아니면 내일일까? 언제 공주님은…….”


비담의 옆얼굴은 날이 선 칼날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덕만은 무릎걸음으로 비담에게 다가갔지만
비담은 그런 덕만을 바라보지도, 막지도 않았다.


 
어서 찌르세요. 공주님.”


묘하게 웃는 비담의 표정은 처량했다.


 
공주님께 죽는 것도 괜찮은 최후일 듯 합니다.”


기어코 덕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비담의 기이한 성정은 사랑에 대한 갈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갈구한다는 것은 그 대상의 단 맛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갈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비담이 원하는 것은 오직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이었다. 끊임없이 버림받고, 괄시하고, 자신을 천대하고 멀리하려는 세상.
대체 어디서부터 비틀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는 연인보다, 자신을 증오하고 거부하는 연인을
원하는 남자라니! 결국 덕만은 모질게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비담을 이 고통에서 건져낼 방도는
오직 하나 뿐이었다.


덕만은 베개 밑에서 단검을 낚아챘다.


 
지옥 같지?”


덕만의 목소리는 슬프고도 무시무시했다.


 
세상이, 인생이, 살아 숨쉰다는 게……죄다 그럴 거야. 그렇지 않아?”


비담은 비로소 고개를 돌려 덕만을 보았다. 덕만은 비담의 우울한 눈에 당혹스러움이 어려 있는 것을 보았다.
깊고도 깊었던 눈. 그 심연에 숨겨져 있던 비틀리고 유치한 본성.


 
그 이유를 몰랐겠지. 그저 문노가 너를 사랑해주기만 하면, 나 덕만이 널 사랑해주기만 하면 모두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그렇게 되기만을 하염없이 바랬겠지?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문노에게 사랑 받고, 나에게 사랑 받으면
그 지옥이 끝날까?”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까?”


비담은 떨려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에 스스로 놀라, 다음 말을 뱉지 못했다. 하지만 덕만의 말은 질풍과도 같이 거침이 없었다.


 
문노는 처음부터 널 사랑했어! 설령 자신의 아들이라도 그렇게까지 사랑하지는 못했을 거야. 자신의 평생과 꿈과,
심지어는 생명까지 주려고 했어. 그런데도 넌 불행했어.”


 
스승님께서 절 사랑하신다는 거, 몰랐습니다!”


 
아니. 넌 알고 있었어. 다만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야. 행복해져도 될 만큼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투쟁하고
싸우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다는 것을! 그래서 결국엔 스승님이 결코 너에게 줄 수 없었던 영역까지 넘보게 됐지.
그리고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 영역까지 허락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을 거야. 물론 문노는
너에게 그걸 줄 수 없었을 테고……. 하지만 넌 그걸로 만족했잖아? , 역시 나는 불행하구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나는 이렇게까지 스승님을 사랑하는데……”


 
그만 두세요!”


비담은 이를 악물었다.


 
삼한지세는 원래부터 제 것이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넘보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것은 당연히
제가 받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비담. 억지부리지 마.”


 
공주님께서야 말로 정말 뭘 모르시네요. 원래 사랑이란 건 그런 겁니다.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아무로 돌아보지 않아요. 삼한지세를 가지려고 그토록 노력하지 않았다면, 밤을 새워 검술를 연마하고,
스승님의 눈에 들고자 발악하지 않았다면!”


덕만은 말을 멈춘 비담을 보았다. 비담의 눈은 말 그대로 타오르는 불 같았다. 큰 물 위를 덮은 검은 불꽃.


 
“……
스승님은 저를 돌아보지조차 않았을 겁니다. 하물며 덕만, 고귀하기 짝이 없는 신국의 공주님!
공주님께서는 제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절 돌아보셨겠습니까? 절 은애하신다고요?
말로만 사랑을 말하고 정작 행동으로는 멀리하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이 봤습니다.
그런 사랑이 대체 무슨 쓸 데가 있단 말입니까? 전 가질 겁니다. 약탈하고 훔치고, 주위의 모든 것을 불태워서,
그 사람의 눈 속에 들어오는 것이 오직 저 하나뿐 이도록 할 겁니다!”


덕만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새삼 유신랑의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뒤틀리고 꼬인 마음, 외롭고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를 학대하는 서글픈 영혼. 그에게 자유를 주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인 듯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방법을, 비담 본인도 원하고 있었다.


덕만은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마음이, 불 위에 놓인 질그릇 속의 물처럼 어지러이 끓어올랐다.
눈 앞이 선명해졌다가 희미해졌다가, 마침내는 먼 곳을 보듯 가까운 곳을 보는 듯 요동쳤다.


포기해야만 하나?


덕만은 칼을 쥔 팔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버려야 하나?


생각나는 것은 언니의 얼굴이었다. 나 대신 화살을 맞고 동굴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언니. 한 인간으로서,
여인으로서 살라던 그 따듯한 목소리를 덕만은 떠올렸다. 하지만 그런 언니조차 덕만은 외면했었다.
유신랑의 뜨거운 포옹도, 달콤한 목소리도 모두 거절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 불안정하고 이기적인 남자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덕만은 입술을 깨물었다.


안녕, 언니.


덕만의 손을 떠난 단검이 소리도 없이 침상 위를 굴렀다.


 
그럼, 그렇게 하자.”


비담의 놀란 눈이 덕만을 올려다보았다. 덕만은 울고 있었지만 또한 웃고 있었다.
모든 것에 대한 답이, 이토록 가까이 있었다니.


 
꿈도 잊고, 세상도 잊고. 계림의 운명도 잊자. 우리 둘의 운명만이 여기에 있도록.”


덕만은 침상 위에 천천히 앉았다. 이제 상대를 올려다보는 것은 비담이 아니라 덕만이었다.


 
내 꿈이 되어줘.”


비담의 눈은 여전히 크게 열려 있었다. 덕만의 말이 비담의 머릿속에서 커다란 북소리처럼 울린다.
비담의 입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포기……. 하신단 말씀입니까? 모든 것을?”


덕만은 웃었다. 눈물로 얼룩져 있었지만 별빛처럼 환한 웃음이었다.


 
그래. 네 눈 속에는 나만 비치고, 내 눈 속에는 너만 비치는 그런 곳으로 가자. 우리……. 셋이서.”


비담의 몸이 휘청 꺾였다. 거의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은 비담은 덕만의 하얀 손이 자신의 손 위에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
우린 행복해질 거야.”


비담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검은 눈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져 내려, 비단 깃에 둥근 무늬를 만들고는
이내 깊숙이 스며들었다. 한동안 그렇게 먼 곳을 보던 비담은 자세를 고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몸을 굽혀
하얀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덕만의 벗은 발에 입을 맞추었다. 덕만의 발을 적시는 비담의 눈물은 따듯했다.    


 
믿을 수가 없어요. 이건 혹시 꿈일까요?”


 
꿈 같은 거 아냐.”


덕만의 목소리에는 어느 새 장난스런 미소가 어려 있었다. 비담의 유연하고 긴 팔이 여름 밤의 미풍처럼
부드럽게 덕만의 몸을 감싸 안았고, 뒤이어 연인의 입술이 부드럽게 겹쳐졌다. 눈물과 미소가 한데 뒤섞인
덕만의 몸은 아련하고도 향긋했다. 비담의 뜨거운 입술은 그런 덕만의 하얗고 둥근 뺨과 우아한 목덜미,
곡선을 그리는 쇄골과 어깨를 스쳤다. 어린 나무덩굴처럼 유연한 덕만의 팔이 넓은 비담의 등을 감아들었고,
비담은 온 몸으로 그러한 연인의 몸짓을 받아들였다. 어둑한 방을 밝히던 촛불은 꺼진 지 오래였다.
어둡고도 따듯한 대기 속에서, 갓 태어난 아기 같은 두 사람은 서로에게 서로를 주었다.



6.


여기저기 굳은 살이 박히기는 했으되, 선천적으로 섬세한 손이었다. 비담은 돕는 이 없이 허리에 대(
)를 매고
조심스레 매듭지어 왕의 성장(
盛裝)을 차렸다. 그리고는 조용히 시동을 불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구 중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내오라 했다. 비밀 많은 출생 탓에 삶의 대부분을 초라한 모습으로 지냈지만,
비담은 원래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다. 비담은 꽃처럼 풀잎처럼 바스러지고 싶었다. 기왕 떠나야 한다면…….

긴 옷자락을 끌며 비담은 침상으로 다가섰다.


 
덕만.’


비담의 손이 고이 잠든 덕만의 볼 위까지 다가갔다가 급히 거두어졌다. 깊이 잠든 연인을 깨울 수 있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 밤 덕만과 비담은 서로를 보듬어 안고 모든 것을 나누었다. 그것은 서로를 부수고
빼앗던 과거의 날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으로 족해야 하리라. 비담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숨이 새어 나왔다.


이제 공주는 다시 천하를 가질 것이다. 충직한 유신은 주군을 위해 서쪽의 백제부터 북쪽의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들판을 내달을 것이고, 역사는 그런 두 사람을 기록할 것이다.


처음부터 비담이 있을 자리는 그 곳에 없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조용히 갑옷 끈을 여미며 비담은 생각했다.

이미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가진 참이니.


비담은 스승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단정한 얼굴과 엄숙한 언동. 한없이 근엄해 보였지만 또한 한없이 따듯했던
내 아버지. 작은 발로 산과 들을 지났던 날들. 잔뜩 불어난 강을 위태하게 건너던 날들. 초막에 몸을 누이고
숭숭 구멍이 난 지붕 사이로 별을 올려보았던 날들. 하루라도 그리워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아름다웠던 시간들.


내 아이도 그런 아름다운 시간을 겪어 볼 수 있을까?


비담은 몸을 똑바로 폈다. 무거운 갑옷과 투구의 무게가, 이토록 가볍게 느껴진다는 것이 거짓말 같았다.
검푸른 망토가 창 밖에서 흘러 들어 온 상쾌한 새벽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렸다.   

이제는 시간이 되었다.

비담은 덕만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좋은 꿈을 꾸는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마침내 비담의 입술 끝에 미소가 어렸다. 조용히, 그러나 한없이 따듯하게, 비담이 속삭였다

 안녕. 내 공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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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절세마녀 2009/10/18 13:57 # 답글

    kiekie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으엉, 우리 비다미 ㅠㅠㅠㅠㅠ 우리 덕만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kiekie 2009/10/20 20:19 #

    ㅠㅠ 그래도 최대한 해피엔딩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답니다.
    그런데 비담이란 캐릭터 자체가 온전한 해피엔딩이 안되는 친구더군요 ㅠㅠ
  • 검은 고양이 2009/12/27 11:32 # 삭제 답글

    정말로 덕만과 비담이 사랑을 이룬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냥 우리 남길이 잘생긴 얼굴보면 서 한을 달랠 수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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