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덕 & 덕만 팬픽 (中) 팬픽션

빙긋

(2009.10)



3.

 

새 왕이 음란하고 무도(無道)하다는 소문은 들불처럼 서라벌에 번져나갔다.

왕을 음해하려는 확실한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더욱 그 소문을 기묘하게 여겼다.

백성들은 검은 빛깔의 새가 궁궐 위를 종일 배회하고 있다든지, 천명 공주를 모신 사당에서

기묘한 울음소리가 들린다든지 하는 나쁜 소문들을 믿었다. 새 왕의 품성이 잔혹하고 거침이 없어
자신의 권속 피붙이는 물론 사부와 어머니까지 죽였으니, 어찌 하늘의 분노가 없겠느냐고 백성들은 수군거렸다.

 

또한 백성들은 전왕의 하나 남은 피붙이였던 덕만공주의 생사에 대해 궁금해 했다.

금상(今上)의 아비는 폐위된 왕이다. 이것은 금상의 혈통이 진골 왕통이기는 하되 그 격이 낮다는 걸 뜻했다.

백성들은 비담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면 덕만 공주를 왕후로 맞아들여, 왕실의 혈통을 공고히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금상의 즉위 이후 덕만 공주를 보았다는 이는 하나도 없었고

결국 사람들은 덕만 공주가 그 난리통에 죽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의 추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었다. 덕만은 여전히 숨을 쉬는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또한 이미 죽어버린 생령(生靈)이기도 했다.

 

비담은 매일 밤 덕만을 품에 안고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약탈했다. 어둡고 속으로 타 들어가는 비담의 열정을

견뎌내지 못하여 때로 덕만은 정신을 놓아버리기도 하였다. 눈부시게 하얀 덕만의 목덜미는 언제나 비담의

잇자국으로 가득했다. 비담은 게걸스럽게 덕만을 먹고 마셨다. 둘의 침상은 사랑을 나누는 곳이 아니라 흡사

사냥이나 전쟁을 하는 곳 같았다.

 

비담은 때로 자신이 덕만을 증오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메마른 갈증, 끝없는 갈급함은 보통 피를 보고서야

멈추어지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덕만을 벨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덕만을 상하게 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을 베어 이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고 비담은 생각하였다. 실제로 그는 쾌락과 수치심으로
눈물을 떨구는 덕만을 바라보다 몇 번이나 자신의 몸에 상처를 냈다. 손목을 물어뜯고,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쳤다.

격투 끝에 자신에게 굴복한 아름다운 패자(敗者)를 상하게 할 수 없는 탓이었다.


비담은 탄식했다. 이대로는, 언젠가는 덕만을 죽일지도 모른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지독한 욕망
때문에 자신이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을 비담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덕만의 존재는
천천히 심장을 갉아먹는 병과도 같았다. 비담은 조용히 생각했다. 마지막 자제심이 바닥날 때,
나는 기어코 덕만의 목을 조르게 될 것이다.

 

그 전에 덕만을 떠나야 해.

 

하지만 그녀 없이 내가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아니, 정말로 그녀를 단념할 수 있기는 할까?
덕만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나의 죽음.

 

비담은 웃었다. 그래. 그 방법뿐이지. 오래 전부터 오직 그 방법뿐이었지.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더 물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여전히 나를 증오하지?”

 

덕만은 몸을 추스르며 비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증오라그래. 차라리 맘껏 증오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렇다면 결코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덕만은 오래 전부터 베개 속에 감춰 두었던 단검을 떠올렸다. 그녀는 검술을 알았다.
굳이 비담을 죽이려 했다면 이미 오래 전에 죽였을 것이다.

뜨거운 비담의 몸이 그녀의 안에서 녹아내릴 때, 혹은 꿈 같은 쾌락에 젖은 그가 그대로 몸을 포갠 채

아기처럼 잠이 들었을 때......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 때문이었다. 마음! 마음이라! 이 경박하기 짝이 없는 애정이라니.

덕만은 자신이 왜 그러한 순간의 감정에 휘둘리는지 알 수 없었다.

비담은 덕만에게 독이었다. 뱉어 내고 토해 내야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나도 달콤한.

 

하지만 그런 덕만의 복잡한 심경을 비담은 알 리 없었다.

마음 속을 가득 채운 고통을 누르며 비담은 느리게, 그리고 몇 번이고 숨을 들이키면서 말을 이었다.

 

“정말 용서할 수 없는 거야? 모든 걸 잊고 날 받아들여 줄 순 없는 거야? 그 이유가 대체 뭔데?

내가 너의 꿈을 망가트렸기 때문이야? 아니면, 알천을 죽였기 때문이야? 아니면…….”

유신을 죽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비담은 마지막 말을 삼키며 덕만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덕만은 그런 비담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냉랭하게 말했다.

 

 넌 모든 걸 다 망쳐 놨어.”

 

 난 그냥 널 돕고 싶었을 뿐이야. 너에게 세상을 주고 싶었어.”


덕만은 웃었다.

 

 넌 네 자신을 위해 계림을 가졌어. 그리고 그 계림을 누구와도 공유할 생각이 없어.”

 

 그래. 난 내 손에 들어온 건 누구와도 나누지 않아. 하지만 너에게는 주고 싶었어! 그리고
세상을 갖고 싶어했던 건 너도 마찬가지 아냐?”

 

공격적인 비담의 질문에 덕만은 입을 다물었다. 결국 한 우리 안에 두 마리의 맹수는 있을 수 없는 법이다.
비담은 누구보다 천하를 원한 나머지 결국 그것을 위해 사랑도 행복도 버린 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결국 덕만에게 비담은 자신의 꿈을 빼앗은 적이었다.

그렇기에 비담은 그녀가 결코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를 감추고 있으나 덕만 역시 맹수이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사랑해주기만 한다면.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그 이빨 아래 흔적도 없이 갈갈이 찢겨도 좋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다 소용 없는 일이 되었다. 비담은 말없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촛불을 바라보며
자신과 덕만의 관계는 결코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힘겹게 인정하였다.

새로 솟아날 샘물은 없다. 모든 샘이 말라버리는 날, 나는 동정하는 이도 없이 시궁창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리라.

 

하지만, 어찌 되었든 덕만은 지금 내 곁에 있는 것이다.


비담은 하늘을 향해 훨훨 날아오르는 덕만의 날개를 꺾은 자신의 계략이 흡족하였다.
승천한 덕만은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었다. 비록 몸뿐이라도, 덕만을 잃는 것 보다는 가지는 편이 좋았다.
영원히 가질 수 없는 덕만보다는 잠시라도 소유할 수 있는 덕만이 좋았다.

 

 놔주지 않을 거야.”

 

가지런한 하얀 이를 보이며 비담은 아이처럼 웃었다.

 

 결코 놔주지 않겠어. 영원히.”

 



4.

 

덕만은 꿈을 꾸었다. 푸른 새 한 마리가 맑은 서라벌 하늘 위를 선회하다 궁 위로 조붓하게 내려앉는 꿈이었다.
덕만은 담장 위에 앉은 새의 날개 깃을 가까이에서 보았는데 푸르면서도 희고, 희면서도 금빛이 나는 것이
신묘하기 짝이 없었다. 새는 검푸른 눈으로 덕만을 바라보았다. 편안하고 상냥한 눈이었다. 새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덕만은 눈을 떴다.


덕만은 부스럭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비담이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이후에는 한번도 잠자리가
편했던 적이 없었다. 며칠 전에는 신열까지 올라 며칠이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앓기까지 했다.
해가 진 뒤 나타난 비담은 덕만의 펄펄 끓는 머리를 짚어보더니 그림처럼 고요히 침상 곁에 앉아 있다가 물러갔다.
모처럼 편안한 혼자만의 밤이었다. 깊은 어둠 속에서, 덕만은 홀로 뒤척였다. 열 때문에 쉽게 잠들 수 없는 탓이었다.


 
공주님.”


덕만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니면 정말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익숙한 목소리는 다시 한번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덕만 공주님.”


덕만은 반사적으로 베개 밑에 손을 넣었다. 늘 그 곳에 숨겨두었던 차가운 단검의 감촉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누구냐?”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공주님, 저 유신입니다.”


덕만은 숨을 삼켰다.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난 덕만은 떨리는 손으로 탁자 위에 놓인 초에

불을 붙이려 했다. 그런 덕만의 손을 감싸 잡으며, 유신이 말했다.


 
밤이 깊었습니다. 지금 불을 켜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됩니다.”


덕만은 자신의 손을 잡은 유신을 올려다 보았다. 비록 초의 빛은 없었지만 때는 보름,
방 안에 든 달빛은 하얗고도 선연하였다. 유신의 단정한 얼굴과 부드러운 시선을 확인한
덕만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숨을 내쉬었다.


 
“…….
살아 계셨군요.”


유신은 덕만의 창백한 안색과 푹 들어간 뺨을 보고는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잠시의 침묵 후 유신은 힘겹게 말했다.


 
송구스럽습니다. 공주님.”


 
살아계신 것만으로 되었습니다."


유신의 손은 따듯했다. 덕만은 금새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지만 애써 마음을 추슬렀다.
지금 덕만은 한 여인이 아니라 적에게 사로잡힌 주군이었다. 주군의 얼굴로 유신에게 명령하기 위해,
덕만은 이를 악물고 유신에게서 자신의 손을 거두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용화향도와 비천지도는 어찌 되었습니까?”


 
비천지도는 알천랑을 잃은 뒤 전멸했습니다. 용화향도도 태반이 상했으나 죽방과 고도만은 무사합니다.”


 
복야회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복야회의 피해는 적은 편입니다. 표면적으로 나서서 싸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만큼 직접적인 피해가 없었습니다.”


덕만은 가만히 아군의 군세를 가늠했다. 복야회를 품 안에서 키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들이 충성하는 것이 비록 신라가 아니라 해도, 결국 그들은 유신과 덕만을 위해 싸울 것이다.


 
하지만 복야회의 인원만으로 궁을 점령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다른 병력은 없습니까?”


 
아버님의 사병이 있습니다. 하지만 복야회와 사병들을 모두 모은다 해도 궁으로 들어오는 것은…….”


 
. 그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 없습니다. 비담을 궁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 상책입니다.”


유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시지요, 공주님. 만월이기는 하지만 비밀통로를 이용하면 충분히 궁 밖으로 빠져나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아닙니다. 저는 남겠습니다.”


놀라는 유신에게 덕만은 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아서, 후일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안 됩니다. 공주님.”


유신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높았다.


 
제가 이 곳에 직접 온 것은 공주님을 무사히 모시고 가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공주님을
이런 험한 곳에 계속 계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비담은 계속해서 공주님을…….”


, 유신은 말을 멈추었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 하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덕만의 흩어진 옷차림과 파리한 얼굴을 마주하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비담의 어두운 욕망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던 터, 그 자가 자신의 손 안에 들어온 보석을
게걸스레 탐했을 것이란 것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찌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당황한 기색으로 말을 멈춘 유신을 구한 것은 덕만의 건조한 목소리였다. 


 
비담은 영리한 자입니다. 제가 갑자기 없어지면 유신랑이 아직 살아 계시다는 것을,
그래서 용화향도와 복야회가 움직일 것이라는 걸 금방 파악할 겁니다.”


 
하지만 비담은 제가 살아있단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놀라는 덕만에게 유신이 계속해서 말했다.


 
피를 쏟으며 죽어가는 저를 거둔 것도 비담입니다. 아마도 복야회의 잔당들을 잡고자 했던 것이겠지만…….
저는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탈출했습니다.”


덕만은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며 유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적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 누구든
가차없이 베어 버리는 비담의 평소 행동과는 너무도 다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덕만의
생각에 유신도 동의하는 듯 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자입니다. 저를 잡아놓고도 왜 죽이지 않았는지, 어째서 부상이 심한 제가
도망칠 수 있도록 느슨하게 경계했는지……. 마치 적을 잡아놓고도 놓아 준 격이 아닙니까?”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다음 일을 생각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공주님, 마음을 돌려 저와 함께 가시지요.”


덕만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비담이 궁 밖으로 행차하는 날을 기다리세요. 돌아오는 초하루…….”


갑자기 밀려오는 현기증에 덕만은 고개를 꺾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한 끔찍한 어지러움이었다.
내 몸이 대체 왜 이러지? 덕만은 의아함 속에서 바닥으로 무너졌다. 나는 그저 돌아오는 초하루,
비담이 고구려 국경으로 행차할 것이라고 말하려 했을 뿐인데. 은밀히 움직이는 것이라 최소한의
수하만 대동하고 갈 것이라고, 모처럼 바람을 쐴 수 있도록 나도 데리고 가 주마 비담이 약속했던 것을
말하려 했을 뿐인데. 어째서 그 이야기를 유신에게 할 수 없는 것일까?


덕만은 자신을 붙드는 유신의 손과 팔을 느꼈다. 그리고 몰래 숨어든 유신에게는 더 이상 이 곳에
머물 시간이 없다는 것도 상기하였다. 덕만은 다시 한번 있는 힘을 모두 짜내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말이라고도 할 수 없는 나지막한 신음이었다.
덕만은 자신에게 더 이상은 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대로라면 한 마디의 비밀도 덕만은 뱉지 못할 것이다. 온 몸의 힘이 방울방울 떨어져 나가는 듯한 무력감에
덕만은 당황했다.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나는 그저 나의 적을…….


설마?


덕만은 아스라이 스러지려는 정신을 붙잡으면서 생각했다. 그럴 리 없어. 설마, 그럴 리가…….

이미 영영 어두워진 시야에 영롱한 은색 빛 줄기가 선회했다. 청조. 그 푸르고 신령한 새였다.
궁의 처마를 떠난 청조는 잠시 긴 울음소리를 내며 허공에 머물다가, 자신을 바라보고 선 덕만에게
왈칵 달려들었다. 그리고 마치 쪽빛 물감처럼 덕만에게 스며들었다.


푸르고도 하얀 신령한 새....... 기쁨이자 슬픔, 선물이자 재앙. 덕만은 더 이상 슬프지도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청조의 빛이 사라진 어두운 세상은 어느 새 청량한 별빛으로 가득하였다. 눈 앞에 다가온 사실을 인정하며
덕만은 천천히 자신의 배를 감싸 안았다. 안온하고 따듯한 기분에 휩싸여, 덕만은 눈을 감았다.


 
공주님.”


유신의 목소리는 당혹감과 경악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 역시 보았던 것이다. 덕만에게 환영처럼 스며드는 청조(
靑鳥).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유신의 굳건한 눈썹과 선명한 눈이 똑바로 덕만을 올려다보았다.
덕만은 그런 그의 눈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전에는 한 번도 피한 적이 없는 시선이다.
그만큼 덕만은 정신은 누구보다 청아(
淸雅)하고 고결했다. 하지만 사로잡힌 공주에게는 더 이상 그런 힘이 없었다.
비담과의 시간은 덕만의 의지와 성품을 무너트렸고, 명료한 정신을 황폐화시켰다.


 
안 됩니다. 얻을 것이 없는 관계입니다.”


유신의 목소리는 강하고 또렷했다.


 
비담, 그 자는 공주님을 파괴할 겁니다.”


 
“……
유신랑. 나도 그쯤은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러한 마음이시라면, 어찌하여 우십니까?”


덕만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손을 들어 뺨을 더듬고 나서야,
덕만은 자신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주님.”


유신의 목소리는 아팠다. 찌르르한 통증에 덕만은 자신도 모르게 얕은 숨을 뱉었다.


 
복중의 아기씨 때문입니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불의(
不義)한 씨라고는 하나,
오직 공주님의 적통이라는 것만으로도…….”


 
그만 하세요, 유신랑. 그만.”


덕만은 허리를 굽혀 탁자 위로 엎드렸다. 극심한 어지럼증 때문에 몸을 세우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아이에게 불의하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말아요. 태중의 생명도 다 듣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아이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입니다. 내가 우는 것은 아이 때문이 아니에요. 나는 다만…….”


덕만은 잠시 말을 멈추고 탁자 위로 번져가는 자신의 눈물 자국을 보았다.


 
다만 은애(
恩愛)합니다.”


 
공주님!”


 
아이의 아비라서가 아닙니다. 어설픈 동정심도 아니에요. 계림을 훔친 반도이자 내 사람들을 벤 원수임에도,
은애합니다. 은애하고 있었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기에 오래 전 가슴 속에 묻었지만……
한 때 유신랑에게 그리하였듯, 비담 그 사람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유신의 눈빛이 기어코 흔들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호했다.


 
하지만 그리하여 어쩌시겠습니까? 그를 용서하실 수 있겠습니까? 설령 공주님이 그를 용서하더라도,
저는 그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비명에 간 알천랑도, 문노공도, 수많은 낭도들과 병사들도 비담을 용서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신라의 칠백 년 전통을 늑탈하고 공주님을 범했습니다. 이런 자를 어떻게 용서하란 말씀입니까?”


덕만은 웃었다. 어찌하여 유신 저 사람은 저렇게도 직설적이고 강직한가. 그리고, 왜 저렇게 언제나 옳은 이야기만 할까.
더는 피할 수 없었기에 덕만은 입을 열었다.


 
“……
고구려 국경입니다. 오는 초하루에 적은 호위병을 데리고 새벽녘에 떠날 것입니다.”


유신을 바라보는 덕만의 눈은 웃는 듯 우는 듯 했다. 유신은 그러한 덕만의 얼굴에서 비담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담의 묘했던 표정들, 뒤죽박죽이었던 언사들이 일순간에 이해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비담의 마음과 영혼은 지금 덕만의 것처럼 온통 모순투성이였던 것이다. 이토록 불안정한 공주님의 모습,
비담에게는 평생을 겪었던 고통이었다. 삶 자체가 거대한 투쟁이었던 외로운 자. 사랑하는 여인의 꿈을 빼앗고
세상을 부수었으며, 마침내는 파멸을 향해 달려나가는 비참한 운명. 유신은 처음으로 비담에게 환멸이 아닌 동정심을 느꼈다.


 
“……
어쩌면 공주님께서 그를 구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덕만은 고개를 들어 유신을 보았다.


 
그의 몸은 아니겠지요. 반역을 저질렀으니, 반드시 효수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영혼만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에게는 그럴 힘이 없습니다.”


덕만은 쓰게 웃었다.


 
다만 같이 침잠(
沈潛)할 뿐이지요. 우리는 서로를 공격하고 서로를 무너트립니다. 은애하는 마음이
꼭 상대에게 좋은 영향만을 주는 건 아니더군요.”


 
쉽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비담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건 오직 공주님이실 겁니다.”


유신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초하루라면 이제 보름이 남았군요. 보름 이후 비담은 죽을 것이나, 그 자의 영혼이 어떻게 될지는 공주님께 달려 있겠지요.”


 
제가 은애하는 이를 위해 외려 유신랑을 배신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안 합니다.”


유신의 대답이 너무 빨랐기에 덕만은 제대로 놀라지도 못했다. 하지만 유신의 태도는 바위처럼 확고했다.


 
그러기엔 계림을, 이 신라를 너무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젊은 장수(
將帥)는 몸을 깊게 숙여 주군에게 예를 표했다.

어느 새 밖은 어슴푸레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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