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1.
고운 명주실을 꼬아 만든 심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초 하나가 완전히 타버린 것이다.
언니의 사당에 들어왔을 때 들고 온 초였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비담.
덕만은 도리질을 쳤다. 하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크고 깊은 눈. 검고, 안으로 타는 듯 이글대는 그 눈은 도무지 덕만을 놓아줄 줄 몰랐다.
덕만은 아직까지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사막에서 계림에 이르는 그 긴 여정에서도,
덕만이 본 것은 큰 강과 큰 산, 그리고 황무지와 초원뿐이었다. 하지만 덕만은 계림에서
몇 시간만 나가면 볼 수 있다는 밑 터진 깊은 물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본 적 없는 바다가, 아마도 비담의 눈동자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 돼.
더 이상은 그 남자에 대해 생각해선 안 돼. 덕만은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오랫동안 찬 바닥에 앉아 있었던 탓인지 온 몸이 삐걱댔다. 이미 다 말라버렸다
생각했던 눈물이 꼭 감은 눈에서 솟아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덕만은 정신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때였다. 나지막한 발소리 하나가 죽은 듯 엎드린 덕만을 흔들었다. 덕만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초가 꺼진 사당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검게 뭉쳐진 그림자처럼
보이는 사람의 형상이, 손 안에서 가볍게 불을 내어 아직 타지 않은 새 초 하나에 불을 붙였다.
상대는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었던 덕만보다 외려 사물을 더 잘 볼 수 있는 듯 했다.
따듯한 초의 불빛이 사당을 은은하게 채웠다. 날렵한 턱 선, 우아하게 뻗은 콧날. 계집처럼 고왔지만
계집 이라기에는 너무 강인해 보이는 한 사람의 옆얼굴이 덕만의 눈을 가득 채웠다.
“마음이 상하실 때면 늘 여기에 계시는군요.”
초에서 물러나며 사내가 말했다. 사각, 하고 비단옷 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덕만은 새삼 그 소리에 전율했다.
“여긴 왜 온 거지?”
메마른 목소리로 덕만이 말했다.
“그렇게 원하던 것들, 다 손에 넣었잖아. 비단옷에 진골 지위에, 곧 병권까지 손에 쥐실 귀한 몸이…….
아니지! 그 정도가 아니겠지. 이제 곧 계림도 통째로 삼키실 텐데, 비단옷, 진골, 그런 게 무슨 대수겠어?”
비담은 한동안 울부짖는 덕만을 내려다보았다. 덕만의 울음소리가 탈진한 듯 잦아들 무렵, 비담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미실을 죽여 드릴까요?”
놀라움으로 커진 덕만의 눈과는 달리 비담의 검은 눈은 여전히 침착하고 차가웠다.
“당신의 언니를 죽인 사람입니다.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평생 핍박한 사람입니다. 제가 죽여드리겠습니다.
목을 자르고 팔 다리를 잘라 계림의 저잣거리에 내걸겠습니다. 아니면 설원랑을 죽여드릴까요?
칠숙은 어떻습니까? 아니면 독화살을 쏜 대남보는 어떻습니까? 이 비담, 당신이 원한다면 누구든지 죽여드릴 수 있습니다.”
덕만은 비명 같은 신음소리를 뱉었다. 비담이라면, 이 마음이 없는 남자라면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심복은 물론이요 사촌과 어머니마저 그는 필요하다면 단숨에 벨 것이다. 덕만은 두려움을 느꼈다.
언제나 죽음의 위험을 곁에 두고 살아 왔지만, 그 어떤 일도 지금 자신의 곁에 선 비담 만큼이나 무섭지는 않았다.
길고 하얀 비담의 손이 가냘프게 떨리고 있는 덕만의 어깨를 잡았다. 비담의 손은 의외로 뜨거웠다. 또한 끈질겼다.
아무리 뿌리치려 해도 점점 더 깊이 파고 들어오는 비담의 손가락에 덕만은 강한 통증을 느꼈다.
“대체 뭘 원하는 거야……”
덕만의 목소리는 처절했다.
“비담! 대체 나에게 뭘 원하는 거야! 모두 가졌잖아. 이해가 안 돼? 이제 넌 누구라도 죽일 수 있어.
나는 방해물이야. 마지막 남은 성골, 무용지물! 어서 죽여서 없애 버려. 네가 벌인 일, 이젠 끝내 버리란 말이야!”
비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덕만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더 했을 뿐이다. 덕만은 있는 힘을 다해 몸을 틀었다.
하지만 비담은 덕만을 놓아주기는커녕 양 팔로 가냘픈 공주의 몸을 끌어당겼다. 꼼짝없이 비담의 팔에 갇힌 덕만은 발버둥을 쳤다.
“처음엔 확실치 않았습니다. 공주님.”
비담은 덕만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연한 쇠 냄새가 나는 비담의 숨결이 공주의 귓가를 스쳤다.
“이 비담이 원하는 것이 천하인지. 혹은…… 공주님인지.”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사당으로 불어 들었다. 비담이 들어올 때,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것이다.
촛불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몸을 흔들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공주님을 원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확했지요…… 하지만 그것이,
그 뜨거운 마음이 천하를 갖고 싶은 마음 때문에 생긴 것인지 아니면 오직 공주님만을 원해서
생긴 것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비담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대체 뭘 원하는 거냐고 물으셨지요? 네, 저도 그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계림을 가졌습니다.
결국……가져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
덕만은 어느 새 다시 울고 있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마!”
“공주님.”
비담의 목소리에도 어느 새 물기가 어려 있었다. 비담은 소리를 내어, 그토록 불러보고 싶었던 한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덕만.”
기어코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덕만, 난 오직 당신만…….”
“그만 해! 그만 두란 말야!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덕만의 폐부를 찢는 듯한 외침에 비담은 말을 멈추었다. 다만 뜨겁고 처량한 눈물만이 비담의 뺨을 계속 적셔갈 뿐이다.
“왜! 왜 대체 너냐고! 너, 너 따위보다 유신랑이 훨씬 훌륭한 사람이야. 그런데 왜! 하필이면 왜 너를……. 미실의 아들인 너를!”
뚝, 하고 덕만은 말을 삼켰다. 하마타면 오랜 세월 동안 그토록 눌러 참아왔던 말을 뱉을 뻔 했던 것이다.
그것도 가장 부적절한 순간에. 그녀는 비담의 검에 쓰러지던 유신을 떠올렸다. 그리고 피를 토하면서도
자신을 몸으로 감싸던 알천의 최후도 떠올렸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덕만의 가슴은 일순간 차디차게 식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는 비담의 귓가에 경멸을 담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날 놓아라. 이 반역자.”
비담의 몸이 번개라도 맞은 듯 일순간에 굳었다. 그에 따라 비처럼 흐르던 눈물 역시 그쳤다. 거의 뿌리치듯,
비담은 자신의 품에서 덕만을 밀어 냈다.
“결국 그거야?”
얼음장 같은 비담의 목소리에 덕만은 몸을 떨었다.
“그런 거였어? 나는……그래도 네가 날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이라도 말야…….”
비담은 덕만을 거칠게 제단 쪽으로 밀쳤다. 제단의 촛대들이 우르르 사당 바닥으로 떨어졌다.
덕만은 애써 몸을 추스르려 했지만 비담 쪽이 더 빨랐다. 제단 위로 쓰러진 덕만을 비담은 뒤에서 거칠게 안았다.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덕만의 몸이 꺾였다. 비담은 덕만을 찍어 누르며 그녀의 머리 장식을 뽑아 냈다.
검고 향긋한 머리칼이 덕만의 어깨 위로 쏟아졌다. 비담은 덕만의 머리칼 속에 얼굴을 묻고 천천히 향기를 맡았다.
오랫동안 사당에 있었던 탓인지, 제사용 향 냄새가 엷은 꽃 향기에 섞여 났다.
“상관없어. 날 싫어해도.”
비담의 차가운 얼굴 위로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강제로라도 갖겠어.”
오랜 시간 남자로 살아왔지만, 그래도 그 말의 뜻을 모를 덕만이 아니었다. 아니, 외려 남자로 살던 세월이
긴 만큼 덕만은 남자의 생리를 잘 알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비담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여자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완력이 아니었다. 덕만을 돌려세운 비담은 거칠 것 없이 그녀의 입술을 가졌다.
여인이라면 오랜 떠돌이 생활 중 머물렀던 몇몇 도시들에서 이미 품어본 적이 있었다.
처량맞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유곽의 여자들. 낯선 이방인에게 마음 설레하던 평범한 계집들.
하지만 덕만의 입술은 지금까지 빼앗아 본 어떤 여자의 것과도 달랐다. 비담은 자신이 꽃과 입맞추었다고 생각했다.
향기롭고, 강하고, 소유하고 싶은 꽃.
순간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비담은 감았던 눈을 떴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맛.
하지만 비담은 오히려 웃었다. 그래. 장미에는 가시가 있지. 비담은 팔을 휘둘러 제단의 물건들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던 제단 위는 비담의 서슬에 텅 비었다. 바로 그 위로, 덕만의 몸이 무너졌다. 비담의 뜨거운
입술은 집요하게 덕만을 탐했다. 둥근 이마, 젖은 속눈썹, 눈물자국으로 가득한 빰…… 하얀 덕만의 얼굴 위로 비담의
입술에서 떨어진 핏방울들이 자취처럼 길게 남았다. 비담이 덕만의 목에 입을 맞추었을 때, 비담은 투명한 물방울이
덕만의 턱 아래로 고여 드는 것을 보았다.
덕만은 울고 있었다.
“……울지 마.”
비담의 목소리는 어린 동생을 어르는 소년처럼 나직하고 상냥했다.
“울지 마, 다치게 하진 않을게.”
덕만은 소름이 돋았다. 이 남자는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는 있는 걸까?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덕만의 비단옷이 뜯겨져 나갔다. 덕만의 하얀 가슴이 희미한 촛불 밑에서
처연하게 빛났다. 비담은 아기처럼 덕만의 품에 매달렸다. 그리고 게걸스럽게 자신의 허기를 채웠다.
덕만은 이제는 아예 자신을 타고 앉은 비담의 몸에서 연한 소금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를 동시에 맡을
수 있었다. 덕만은 그 소금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건 눈물이었다. 속에서 한없이 흐르다가 응어리져,
마침내 커다란 소금 덩어리가 되어버린 슬픔. 그것은 아마 오장육부를 녹이고 폐부를 찌르는 오래된 한이었을 것이다.
덕만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길러 준 사부를 베고 이제는 어머니를 죽이려 드는 이 비정한 사내가
어째서 이토록 사람의 애정을 갈구하는 것인지. 어째서 아기처럼 여인의 가슴에 매달리는 것인지.
“아…….”
덕만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젖히며 나지막한 신음 소리를 냈다. 비담의 열정은 일방적인 것만큼이나 순수한 데가 있었다.
비담은 계속해서 소리 없이 말하고 있었다.
사랑해 줘. 나를.
비담의 손은 거칠게 덕만의 몸을 탐했다. 하얗고 탐스러운 가슴과 부드러운 배, 곡선을 그리는 등과 허리,
그리고 탐스러운 둔부까지.
덕만의 입술 사이에서는 어느 새 달뜬 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덕만은 비담의 목을 감싸 안았다.
하지만 비담은 열에 들떠 덕만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덕만만이 여전히 비담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사랑해 줘. 제발. 날 사랑해 줘. 내 사랑은…….
“……내 사랑은 한번도 보답 받은 적이 없어.”
이번에는 들리지 않는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비담이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어느 새 덕만의 옷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덕만은 비담의 벗은 팔과 단단한 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짓으론 안 돼.”
덕만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말을 이었다.
“이런 짓으론 사랑 받을 수 없어.”
비담의 몸이 일순간 굳었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였다.
“상관 없어.”
뱀처럼 유연하게, 비담은 덕만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받을 것 없어. 그저 내가 먼저 취하면 그만이야.”
덕만은 황급히 다리를 오므리려 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늦어 있었다. 비담의 영혼은 어미 잃은
아이처럼 사랑에 갈급했고, 뜨거운 육체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었다. 덕만은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비담은 잠시 뜨거운 숨을 뱉더니, 곧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덕만은 극심한 고통과 수치심에 몸을 움츠렸다. 이대로 숨이 끊어져, 더 이상 수치를 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뿐이었다. 어디에 있는 거야? 덕만은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나를 지켜주겠다던 그 사람은,
그 춥고 쓸쓸했던 밤, 나를 품에 안으며 영원히 곁에 있겠다 약속했던 그 사람은......
“유신랑……”
비담은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웃었다. 덕만은 절망적인 마음으로 비담의 하얗고 가지런한 이가 촛불 아래에서
빛나는 것을 보았다.
“아아.”
비담의 탄식에는 흐릿한 웃음이 섞여 있었다. 처연하기 그지 없는 웃음이었다.
“정말, 이러기야? 끝까지?”
덕만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무 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품은 이 남자,
한때는 마음에 두었던 이 남자의 존재가 이제는 참을 수 없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한동안 그러한 덕만을 내려다보던
비담이 몸을 일으켰다. 호리호리한 몸에 감긴 부드러운 비단옷이 차가운 사당 바닥에 닿으며 서걱 하는 소리를 냈다.
“그만 할래. 재미없다.”
비담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사당의 계단을 내려섰다. 덕만은 힘없이 제단에 누운 채 그런 비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비담의 등을 감은 하얀 색 붕대를 발견했다. 다치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붕대에는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 다쳤어?”
비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고개를 돌려 덕만을 보았을 뿐이다. 크고 깊은 눈. 슬픔과 분노가 깊게 출렁이는 눈.
덕만은 그만 어지러워졌다. 덕만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비담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2.
“공주님을 가졌어.”
비담의 목소리는 오늘은 새 옷을 입었어, 라고 말하는 소년처럼 천연덕스러웠다.
하지만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어야 하는 유신은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기어코 뿌득, 하고 이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공주님. 처음이더라. 난 네가…….”
비담은 히죽 웃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아냐. 이런 얘기는 그만 하자.”
유신의 발은 공중에 떠 있었다. 비담은 유신의 팔과 몸을 꽁꽁 묶어 벽에 매달았던 것이다.
유신의 까만 전투화 밑에는 붉은 선혈이 흘러내려 작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치명적일 정도로 심한 출혈이었다.
대체 지금까지 몇 번이나 까무러쳤던가? 하지만 유신은 도저히 정신을 놓을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비담의 빠른
검에 무참히 쓰러지던 알천의 모습과,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정신을 잃은 춘추. 그리고, 울면서 자신을 부르던
공주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 앞에 나타나곤 했다.
‘공주님!’
유신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분 때문이라도 정신을 잃을 수 없다. 유신은 죽을 힘을 다 해 손과 발을 죄고
있는 밧줄을 끊어 보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상처만 더욱 벌어질 뿐이었다. 후두둑,
유신의 큰 움직임에 핏방울들이 비처럼 바닥을 적셨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으며 유신이 힘겹게 말했다.
“…….덕만 공주님께…….허튼 짓을 했다간……내가, 네 놈을…….”
비담의 이마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공주님 이름 부르지 마. 그랬다간 나 너 정말 죽여버릴지도 모르거든.”
“죽여라.”
유신은 피를 토할 듯 으르렁댔다.
“차라리 날 죽여!”
“그러고 싶지만……. 안 돼.”
비담은 성한 왼팔을 들어 검 손잡이를 꽉 잡았다. 아까 덕만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비담의 오른쪽 등을 꿰뚫은 상처는 중상이었다. 덕분에 비담은 오른쪽 팔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커다란 바늘 수십 개가 마구 쑤시는 듯한 통증을 참으며 비담은 얼굴을 찡그렸다.
“공주님이 널 찾아. 내 품 속에서도.”
“이놈!”
유신의 입에서 무서운 저주들이 쏟아져 나왔다. 언제나 절도 있게 행동하던 유신의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만큼 유신의 증오는 강렬했다. 하지만 비담은 그러한 유신의 저주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몇 마디 혼잣말을 했을 뿐이다.
“정말 이상하지. 난 공주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는데. 난 정말 공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어 놓을 수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유신 넌 공주님을 배신했잖아. 넌 공주님을 버리고 다른 계집과 혼인했어…….
그런데, 왜 공주님은 여전히 널 찾는 거지?”
비담은 피투성이가 된 유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호기심과 경멸이 섞인 가벼운 표정.
유신이 깊은 신음을 뱉었을 때 비담은 희미한 미소까지 지었다.
울부짖고 싶을 땐 웃는다. 절망스러울 때도 웃고, 허탈할 때도 웃는다. 그것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 하나 없는
세상에 대한 비담의 처세술이었다. 그는 칼을 뽑아 들었다. 이 지겹고 더러운 세상, 차라리 모두 끝내버리고
마는 게 나으리라. 사랑하고 싶었고, 사랑 받고 싶었지만 결국 어느 쪽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비담은 인정할 수 없었다. 이대로 유신을 베고, 사당으로 가서 덕만을 베고, 마지막으로 이 비참한 목숨을 끊으면
편안해질 수 있을까. 복잡한 머릿속과는 달리 비담의 움직임은 단순했다. 그는 검을 들어 단숨에 밧줄을 내리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유신의 몸이 바닥 위로 떨어졌다. 충격을 받았는지 유신은 잦은 기침을 뱉었다. 연한 선혈이
유신의 입가에 침과 함께 섞여 흘러나왔다.
“조금 더 살아 있어 줘야겠어.”
비담은 피로 얼룩진 유신의 등 위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한번만 더 비참해지면 되겠지. 이젠……”
숨을 들이마시는 비담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다. 정신을 잃어가는 유신의 귓가에 비담의 마지막 목소리가
환청처럼 메아리쳤다.
“이젠, 정말 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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